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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Ⅳ-2. 박용만과 국민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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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생도들은 병영에서 기숙하면서 조를 편성해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훈련·학습을 병행했다. 경향신문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들이 일본과 혈전을 벌이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는 ‘독립전쟁론’은 일제하 독립운동의 주요 사상 중 하나였다.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만주, 연해주, 간도 등지에 기지를 만들어 무장항쟁을 벌였다.

미주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민족의 실력을 키우려는 교육·문화 운동, 국제적 지지·후원을 이끌어내려 했던 외교주의 노선과 함께 독립전쟁론도 미주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였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사관학교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한 이는 박용만(1881~1928년)이다. 그는 외교노선을 주장한 이승만과 함께 하와이 독립운동의 양대 거목이었다.

박용만은 고종 18년(1881년) 강원 철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말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 24세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5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링컨 중학교에서 영어와 대학예비과목을 공부하고, 이듬해 9월 헤이스팅스 밀리터리 아카데미에서 군사학을 전공했다.

박용만은 이후 독립전쟁론을 구현할 무장독립운동 노선을 걸어간다. 1908년 네브래스카 대학에 입학한 그는 다음해 대학 인근 커니농장에서 소년병학교를 열었다. 소년병학교는 군사교육·훈련과 함께 국어·영어·과학·체육 등의 교육을 병행했다. 훈련과 교육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의 방식을 따랐다. 소년병학교는 미주 각지 한인사회에 독립전쟁론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다.

박용만은 1911년 신한국보 주필로 일하면서 ‘국민 개병설’ 등 꾸준히 무장독립운동론을 주장했다. 1913년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하와이로 옮긴 그는 계속해 무장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하와이 카할루 지역 아후이마누 마을. 호놀룰루 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이 중산층 주택지구는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일명 산너머병학교)가 있던 자리다. 박용만은 아후이마누 마을에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군단장과 교장을 맡았다.

이곳을 안내한 하와이대 역사학과 최영호 명예교수는 “사관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파인애플 농장이 있던 곳”이라며 “박용만이 사관학교를 세울 땅을 구한다고 하자 박종수 등이 1,500에이커에 이르는 농장 땅을 기부했다”고 말했다.

박용만을 비롯한 국민회의 여러 지도급 인사와 한인들이 무장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해 특별 의연금을 보탰다. 자기 농사를 짓던 임응천·한태경·한치운 등은 한해 농사 수익을 모두 사관학교에 기부했다.

최초 입대한 젊은이는 모두 103명이었다.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최교수는 “이 중에는 왕비 호위 장교 등 구한말 군인(광무군인)들과 의병들도 포함됐다”며 “구상 선생의 삼촌 구종권도 사관학교 부관으로 참여했다”고 전했다.

대조선국민군단 초대 군단장 박용만.
사관학교는 둔전병제(屯田兵制) 형태로 운영됐다. 학도들은 군단에서 기숙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파인애플 농사를 지었고 오후에는 군사학 강의와 군사훈련을 받았다. 호놀룰루시 동북쪽 큰산 너머 해안과 아후이마누강을 낀 계곡에 병영이 있어 학도들은 ‘산 너머 아희들’로 불렸다. 주야를 넘나드는 고된 노동과 훈련 속에서도 낙오자는 없었다.

사관학교 운영은 곧 일본의 반대에 부딪혔다. 최교수는 “일본은 자국과 싸워 나라를 되찾겠다는 군사훈련을 두고볼 수는 없었다”면서 “일본은 미 국무부에 ‘일본은 미국의 우방국인데 왜 우국을 반대하는 군사훈련을 용인하느냐’며 강하게 항의했다”고 말했다.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했던 국민군단과 사관학교는 중국 등 실제 무장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곳에 학도를 보내지는 못했다. 최교수는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생도들이 실제로 만주 등지의 무장독립운동에 투입됐느냐에 대해 회의가 있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군사운동을 통해 독립의지를 알리고 군단과 사관학교에 참여한 이들이 이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 기본적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는 1916년 이후 쇠퇴하기 시작해 1917년 해체된다. 전문가들은 ▲1차 세계대전 등 국제정세의 변화(미·일은 동맹국이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의 재정 악화 ▲하와이 한인사회내 독립운동 이념과 방향을 둘러싼 분열 등을 해체 요인으로 보고 있다.

최교수는 특히 “박용만은 줄기차게 군사운동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했지만 이승만은 현실적으로 일본이 강대국인데 대결 국면으로 가서는 안된다며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다”면서 “한때 의형제 사이였던 이 두 지도자의 대립으로 결국 하와이 한인사회는 둘로 나뉘었고 이후 주기적으로 분쟁했다”고 말했다.

1919년 중국으로 간 박용만은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하고, 1926년에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업개발회사인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해나갔다.

이 사업을 추진하던 중인 1928년 10월 박용만은 의열단원 이해명에게 권총 저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최교수는 “박용만이 중국에서 활동할 시기에 그가 ‘변절했다’ ‘일본의 밀정이다’ ‘호화생활을 한다’ 등 여러 소문이 나돌았으며 이 때문에 결국 피살됐다”면서 “일본이나 박용만의 정적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지만 이런저런 소문들의 사실 여부는 지금이라도 밝혀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미 호놀룰루|김종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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